소수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말의 유현인 안향선생의 연고지에다
중종 37년 (1542년) 사묘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으며 명종 5년(1550년) 퇴계 이황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나라에 건의, 왕으로 부터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게되어 최초의 사액서원
이자 공인된 사립고등 교육기관이 되었다. (소수서원 안내문에 발췌)
풍기읍을 지날때는 마침 풍기장날이라 인삼과 사과와 인견을 구경하고
또 몇가지 사기도 하면서 부석사 가는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달리니
국화분을 쭈욱 늘어놓은 소수서원이 보였다.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길과 주차장에 온통 가을 국화가 아름답게
진열되어 찾아오는 길손을 반기고 있었다.

이곳은 주차비도 없고 입장료도 싼 편이다.
소수서원과, 박물관, 선비촌을 한데묶어서 3,000 원이다. 물론 65세 이상에게는
받지 않고.
먼저 들렸던 희방사에서는 주차비를 5,000 원이나 내고도 문화재관람비 2,000 원을
또 냈는데....

어딜 가나 국화천지다.

서원에 웬 당간지주일까?
설명서를 읽어보니 이 당간지주는 단종복위 실패로 소실되었던 절, 숙수사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소수서원 자리가 숙숙사의 절터인 셈이다.
보물 59호로 지정된것이다.

수령 500년된 은행나무.
소수서원 문앞에 있었는데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안향선생을 비롯, 주세붕,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 다섯분의
초상을 모신곳이다.

문성공묘. 보물 1402호로 지정된 안향선생의 위패를 모신곳으로 후에 안보와 안축
주세붕을 함께 모시고 매년 3월과 9월 초 하룻날에 재향을 모신다고 한다.

오늘날의 도서관

정료대와 관세대
밤에 서원에 불을 밝히던 조명시설인 정료대는 나무 윗부분에 석재를 놓고
그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고 하는데 나무가 불에 타서 부분만 남았는데도
살아있는게 신기하다.
옆에 있는 관세대는 사당 참배시 손을 씻도록 대야를 올려놓던 받침대라고 한다.

서원의 원장과 교수의 집무실이다.

직방제도 위의 일신제와 마찬가지로 집무실

유학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다.

이곳역시 기숙사. 스승의 그림자를 피해 뒷물림하여 지었다고 한다.

일영대, 해시계다.
맑은날 윗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어릴적 집에 시계가 없던 시절에 해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가늠해서 학교에 가던
생각을 나게 한다.




서원 뒷쪽의 탁영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 류운용이 풍기군수를 지낼때 팠다고 한다.


서원뒷쪽 박물관 가는 길로 접어 들었다. 박물관 가는 길가에 있는 광풍정이란
정자다.

박물관 마당의 고인돌

박물관 안인데 사진찰영 금지다.

하사준이라고 숙종이 주세붕 사당에 하사한 술항아리로 양, 돼지, 코끼리
모양으로 되어 있다.
박물관은 입구에 있는 이 모형 세가지만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안에 진열된
진품들은 사진찰영 금지.

유명한 경자바위다. 멀리서 줌을 당겨서 찍었는데도 글씨가 또렷하다.
백운동이라는 글씨는 퇴계 이황선생의 글씨이고 붉은색의 경 자는 주세붕이 직접 쓰서
새겼다고하며 유교의 근본 사상인 경천애인의 머릿글자다.
세조때 단종복위 거사실패로 화를 당했던 고을 사람들의 피가 흘러내렸던 소에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 당시 풍기군수인 주세붕이 이 글씨에 붉은 칠을 하여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드니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그야말로 영주는 역사의 고장, 선비의 고장이다.
소수서원, 그저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는 정도밖에 몰랐는데 이곳에 와서
안내문을 읽으면서 많은것을 배웠다. 역시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의 뜻을 실감
하면서.... 이 포슽의 모든 설명은 안내문에서 발췌할수 밖에 없었던 내 얕은
지식창고에 더 많은 자료들을 쌓아 놓지만 돌아서면 또 잊어 버리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