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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초등학교 3학년, 내가 겪은 6,25

by 데레사^^ 2017. 6. 25.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아버지께서  밖에  나갔다 오시드니  “난리가 났다,  피난 가야 한다”  고

어머니 더러  짐을  싸라고  하셨다.

바깥을  내다보니  어디서  오는지  짐을  이고  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계속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철없던  나는  그게 왜 그리 좋아 보이는지  우리도  어서 가자고

부모님을  졸랐다.

어머니는  살림살이들을  차마  못 잊어서  짐을  쌌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고,  아버지와  나는  독촉하고…..  이러면서  시간이  제법

흘러 갔다.

 

우리는  경상북도  영덕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곳 우체국에

근무 하셨기  때문이다.   나보다 일곱살이  더 많은  언니도 그때

우체국에  근무했는데  언니는  피난을  갈수  없다고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만   피난 대열에 끼어  고향인  경주로

향했다.

언니더러는  우체국에서  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경주 외가로

찾아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는  책보만  허리에  차고  나섰다.

그때는  책가방이  없던 시절이라  우리는  검은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차기도 하고  손에 들기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그  책보도  만만치는  않았다.

영덕에서  강구를  지나고   흥해를  지나고  포항을  거쳐   경주까지

오는데  꼬박  1주일이  걸렸다.

 

오는  중간에  친척집이  피난  안가고  있으면  그곳에  들려서  자기도

하고  때로는   누구네  헛간 같은데  들어가서  자기도  했으니

모기에  물리고   더위에 시달리고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경주에 와서도  편하진  않았다.

외가의 도움으로  겨우  자리를  잡고,   언니는   군부대의  교환원으로

가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나도  다시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경주도  피난을  가게 되었다.

우리는  또  짐을  싸서  작은 외숙모의  친정이  있는  불국사  밑의

마을로   피난을  갔다.    한꺼번에  딸네  시댁  식구들이  다  모여

드니   그댁도  방이 모자라서  헛간이며   마굿간이며  아무데서나

지냈다.

 

그러다  경주로  다시 돌아 왔다.

지금도  기억에  선한건   돌아 온  집에는  웬  벌레와  구데기들이

그리도  많던지…..  부모님은   팔을  걷어부치고  쓸고 닦고

며칠을   고생을   하셨다.

그리고  그해  가을,  나는   경주의  계림학교로   들어갔고

언니는   휴전때  까지   일선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전화교환원으로

일했다.    군인은  아니었지만  언니를  만나러 가면  군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피난이라고 해도  고향에  돌아왔으니  고생을  덜했지만

서울이나  타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은  늘 머리에 자루나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식량을  동냥했다.   그들이  갖고  온  수예품이나

옷가지들을  받고  감자나  호박, 때로는  보리쌀  같은걸   주면

고맙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초등학교   3학년의  어린 내  눈에  비친  6,25 전쟁은  배고프고

고달펐다.    학교에는  도시락을  싸 올수  있는  학생이  절반도

되지 않았고  하교길에  운수 좋으면  미군들이 찦차에서 던져주는

건빵이나  캬라멜   이런것들에  환호를  했었다.

 

동네에는  목발을  짚은  상이군인들이  늘어갔다.

온순하고   착하던   친구오빠가  상이군인이  되드니   난폭해

지는것도   봤고,    친구아버지의  전사소식도  들었다.

시장에 가면  미군양말과  낙하산 천이  인기가  있었다.

미군양말을  풀어서  스웨타를  짜고   낙하산  천으로 옷을

해입었다.

그리고  배급주는  우유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먹었는데

그 떡이  식으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던  생각도

난다.

 

점심이라곤   먹어보지도  못하고  누렇게  뜬  얼굴에는

버짐이  핀  아이들이  대부분이 었다.

 

오늘  성당미사 시간에  통일의 노래를  불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꿍에도 소원이 통일…..

신부님이 선창을  해서 따라  부르면서   그때

그 시절,  배고프고  서럽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열살,  초등학교   3학년의  나의 6,25는   이렇게  배고팠던

기억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 하고  있지만   연령에 따라

기억하는것이  다르다  해도   전쟁의 비참함을   느낀건

다  같으리라.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 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뜬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 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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