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로 못간 왕의 어머니들을 모신곳 2014/11/14 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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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궁은 왕을 낳았으나 정식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로 못간 왕의 어머니 일곱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비롯하여 일곱분을 모시고 있으나 건물은 5채인것이 한 곳에 두분을 모신곳도 있기 때문이다.
칠궁의 공식명칭은 육상궁으로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곳이지만 어쩌면 한 서린 여인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일것도 같다.
청와대와 담이 붙어 있어서 일반에 개방은 하고 있으나 출입을 할려면 청와대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현재는 청와대 관람자만이 들어 갈 수가 있다.
사진으로 보다시피 왼쪽이 도로이지만 청와대를 거치지 않고는 들어 갈 수가 없게 되어있다.
입구는 조선시대 민가로 들어가는것 같이 생겨 있다. 청와대 관람이 끝난후 희망자에 한하여 경호원과 문화재해설사의 인솔하에 왼쪽의 대문 안으로 들어 갔다.
우리에게 설명을 해 준 문화해설사다. 오른쪽 현대식 건물이 청와대라 사진은 왼쪽방향으로만 찍고 오른쪽으로는 못 찍게했다.
재실이다. 이곳은 육상궁(칠궁의 공식명칭)을 수호하는 관원이 거처 하며 제사를 준비하던 제실로 제사때는 왕이 이곳에 나와서 대기하기도 하였다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송죽재와 풍월헌이다.
풍월헌, 정면 8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조선민가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1802년산 주목으로 결이 곱고 붉은색이 아름다우며 잘 썩지않아 관의 재료로 최상품 대접을 받았는데 주목의 붉은 색이 잡귀를 쫓고 영원한 내세를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진종을 낳은 정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궁이다. 진종은 정빈에게서 태어나 세자로 정해졌지만 열살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즉위 후 진종에게 왕의 칭호를 주고 정빈을 위해 정조 2년(1778년) 에 경복궁 서쪽에 사당을 세우고 연호궁이라 이름 지었다. 연호궁은 고종7년 (1870년) 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육상궁은 숙종의 후궁으로서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궁이다. 영조는 즉위하면서 경복궁 북쪽인 현재의 위치에 어머니의 사당을 건립하였다. 건립당시에는 사당이름을 숙빈묘라 하였고 영조 20년 (1744년)에 육상묘로 이름을 고쳤으며 영조 29년(1753년)에 현재의 명칭인 육상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육상궁은 고종 219년(1882년)에 불타 없어졌다가 이듬 해 다시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육상궁의 육( 毓 ) 자 처음보는 한문이라 해설사에게 물어보니 기를 육자라고 한다.
돌담이 아주 운치있다. 당시의 것인지 현재의인지는 모르겠다. 해설사에게 물어볼걸....
건물들을 보면 신위를 모신 사당이라는 느낌 보다는 아름다운 조선시대의 민가같은 느낌이 많다.
이 우물이 냉천으로 흘러서 아래의 연못으로 들어간다. 제사때 이 우물물을 사용하였다고 함.
이 연못이 냉천에서 흘러나온 물로 만들어진것이다.
이 비문을 영조가 지었다고 한다.
냉천정은 영조가 어머니의 제삿날에 나와서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가다듬어 제사를 준비하던 집으로 육상궁 연호궁 경역과 대빈궁 경우궁 경역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1725년 육상궁과 더불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두 칸은 온돌방, 동편 한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다.
덕안궁은 고종의 후궁으로서 영왕을 낳은 순헌 귀빈 엄씨의 신주를 모신궁이다. 광무 원년(1897년)에 엄비가 아들을 낳으면서 경운궁 안에 거처할 궁을 세워 그 궁을 경선궁이라 불렀고 엄비가 세상을 떠나자 덕안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3년에 새로 궁을 짓고 엄귀비의 신주를 모셨다가 1929년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빈궁, 장희빈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경종을 낳은 희빈은 숙종 27년( 1701년) 에 사망한 후 신위를 정동에 있는 집에 모셨다가 경종2년 (1722년) 희빈에게 옥산부대빈의 칭호를 내리면서 사당을 현재의 교동인 경행방에 세웠다. 고종7년(1870년) 육상궁으로 옮겨졌으나 얼마 후 경행방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1908년에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겨 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원종을 낳은 인빈 김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의 칭호를 받았다. 인빈이 세상을 떠난후 원종이 살던 송현궁에 신위를 모시고 저경궁이라 이름지었다. 이후 저경궁은 고종7년 (1870년) 계동에 있는 경우궁 안으로 옮겨졌고 1908년 육상궁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의 현판은 경우궁으로만 보이지만 안쪽으로 선희궁과 합쳐져 있다.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으로서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수빈은 순조20년 (1820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신위를 창경궁 안의 건물에 모시고 현사궁이라 이름지었다. 이후 현재의 종로구 계동인 양덕방에 따로 묘를 세우고 이름을 경우궁으로 하여 신주를 모셨다. 이후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현재의 옥인동인 인왕동으로 옮겨졌다가 1908년에 다른 궁들과 함께 육상궁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장조를 낳은 영빈 이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장조는 영조의 셋째 아들도 세자에 정해졌으나 영조의 미움을 받아 28세에 세상을 떠났다. 영빈이 영조 40년 (1764년)에 세상을 떠나자 백운동에 묘를 세워 의열묘라 칭했다. 정조 12년(1788년) 에 묘의 이름을 선희궁으로 바꾸고 고종 7 년에 육상궁으로 옮겨왔다가 백운동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다가 1908년에 육상궁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우궁 뒷편으로 단풍이 곱다. 깜빡잊고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돌리다가 해설사에게 지적당하기도 했다.
30여분에 걸친 칠궁 관람은 경호원과 해설사가 이끄는대로 따라 다녔지만 설명은 제대로 들었다. 저경궁, 대빈궁, 육상궁, 연우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어서 때때로 한숨도 나오고 당시의 모습이 상상되기도 했다.
해설사의 설명과 각 궁마다 앞에 쓰인 설명문을 참고로 포스팅을 하고 보니 나도 공부를 많이 한것 같다. 이래서 다시 한번 블로그 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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