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을 정리 중이다. 무슨 사진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남길 것과 없앨 것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다. 아이들하고 찍은 건 아이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고 또 너무 아까운 사진은 없애기가 주저되기도 한다.
앨범을 보다가 문득 아, 라때는 이랬구나 하는 사진들 중에서 등산
사진들이 유독 지금과 너무 달라 여기 블친님들께 보여 드리려고 한다.
![](https://blog.kakaocdn.net/dn/bXOHyE/btsKU6mOC40/pTKLLTA2JmBIcticwCFBHk/img.jpg)
아마, 양산의 토곡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앞에 앉은 여자들의 발을 보면
실내화 같은 운동화다. 등산화가 따로 없던 시절, 남자들은 군대 때 신었던
워커를 신는 사람이 많았고 여자들은 저 운동화를 신었다.
저런 신발을 신고도 1,000미터가 넘는 산, 그때는 요즘같이 등산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나침판과 지도를 들고 정상을 찾아다녔는데 저 신발들이
불편한 줄은 전혀 몰랐다.
![](https://blog.kakaocdn.net/dn/q3kP4/btsKTV7L96X/QubzmBinqkx6PXYtT3KPtk/img.jpg)
1962년쯤 국제신문사와 합동으로 시민안내등반을 한 사진이다.
원효산이 1,000 미터에 가까운 산인데 해마다 시민안내 등반을 했다.
신문을 통하여 공고하고 시민들로부터 신청을 받아서 진행했다.
사진 맨 앞줄 왼쪽에 보면 한복 입은 분이 계신다.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고무신을 신고 1,000미터 가까운 산을 올랐다.
![](https://blog.kakaocdn.net/dn/clmKCy/btsKU7eX960/XJepNE3LxmhITUM3sgchFk/img.jpg)
아까 한복 입으신 여자분, 이 사진에서 보니 핸드백까지 들었다.
![](https://blog.kakaocdn.net/dn/q5HIH/btsKTTI0egL/qTuZiYka1JY4Vn0Lopxku0/img.jpg)
김해 무척산을 생림 쪽에서 올라가면 폭포가 있었다.
바지저고리를 입은 할아버지는 700미터가 넘는 무척산을 저 차림으로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올라오셔서 산정의 호수를 보고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https://blog.kakaocdn.net/dn/bA3rRi/btsKTEkAg01/WjfXUPax3kq0AIc7AEMlPk/img.jpg)
![](https://blog.kakaocdn.net/dn/GHLJN/btsKVIeHwrI/SKhxggpauT8kl4lFk69WO0/img.jpg)
야영을 할 때는 저런 식으로 밥을 해 먹었다.
군용 항고를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불을 피워서 밥을 했는데 그 밥이
아주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https://blog.kakaocdn.net/dn/AEWTl/btsKVAOAVhB/KTbLcoNCEHZWute3REHUc0/img.jpg)
금정산 상계봉 부산산악회 조림지에 나무를 심고 나서
당시 MBC 라디오의 아침 방송 자갈치 아지매로 유명했던
김옥희 성우와 함께 찍은 것, 앞이 김옥희 성우다.
![](https://blog.kakaocdn.net/dn/brjQOy/btsKSRdU9ZQ/YkiRMBv1cYRK0eknYCoW0K/img.jpg)
여기는 어느 산일까? 지도교수님과 함께 대학 산악부 시절이다.
몇 장의 사진으로 그때의 부산에서의 등산환경을 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시골마을에 들어서면 서커스단이나 온 줄 알고 뒤를 따르며
구경하던 아이들이 있던 시절, 국문과의 학생이면서 나는 산악부로
들어갔고, 그 산악부 선배가 부산산악회의 창설멤버여서 우리도 다 회원이
되었다. 국제신보나 부산일보와 합동으로 시민안내 등반도 여러 번 했는데
주로 원효산과 금정산, 추석에는 달맞이 등산으로 달음산을 안내했다.
나는 주로 선발대로 뽑혀 몇 사람의 대원들과 같이 솥이랑 국거리를 메고 가서
국을 끓이는 담당을 했다.
100명이 넘는 시민들에게 국 대접을 산 정상에서 하다니 지금은 있을 수도
없는 얘기지만 그때는 그랬다.
참 많은 산을 잘도 다녔다.
그러나 이제는 라때는으로 정리하고 우리 집 거실에서 보이는 모락산과
수리산, 관악산을 눈으로만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