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조금 앞 두고 그이는 가 버렸다.
올림픽 중계를 보고 가겠다고 매일 기도했는데도 그의 기도는 먹히지 않았다.
스포츠 관람을 워낙 좋아했기에 내 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올림픽경기
중계를 보고 싶어했던 소원,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바랐는데 말이다.
오늘은 33번째의 제삿날, 음식마련을 해서 산소에 갔다.
아들과 딸과 나, 셋이서.
분당에 있는 메모리얼파크로 가는 길에는 여기 저기 장미가 핀 곳이 많다.
아들이 운전을 해서 나는 좌석에 앉아서 꽃구경만 했다.
메모리얼 파크가 아니고 남서울 공원묘지일때 여기로 오는 길은 허허벌판이었다.
개울이 흘러가고 드문드문 집들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분당 신도시가 들어서고
신도시의 한복판은 아니지만 분당 야탑동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납골당도 생기고 서양식 평면묘지도 생겼다. 이름조차 남서울 공원묘지에서
분당 메모리얼파크라는 현대식으로 바뀌어 버렸다.
서울에서 가깝다 보니 연예인들도 많이 왔다. 우리 산소 올라가는 길목에는 배우 박용하의
묘가 있는데 아직도 추모객들이 보인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본팬들의 추모행렬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작약도 피었다.
산소에 가보면 놓고 간 꽃다발도 많이 보인다.
나야 할매니까 꽃다발 보다는 음식이다.
밥 하고 생선굽고, 전 부치고, 나물하고, 그리고 과일 떡 술....
상석에다 이 음식들을 차려놓고 절하는것이 우리집 성묘풍경이다.
지난번 산소에 왔을때 잔디가 너무 볼품이 없어져서 사무실에가서 얘기했드니
자꾸만 파묘를 해서 납골당으로 옮기라고 권유를 했다. 우리 산소는 파묘하면 우리에게
한 푼의 보상도 없고 납골당에 모시는 돈은 1,000만원 이상을 내라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급한것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우선 잔디를 심어달라고 했다.
40만원이라 해서 결재를 그 자리에서 하고 왔다.
공원묘지지만 우리 묘역은 6평이다. 지금은 3평이지만 그때는 6평이 기준이었다.
6평이 적어 보일수도 있지만 우리가족이 돗자리 펴놓고 절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넓이인데
이곳을 공짜로 포기하고 학생들 신발장 크기만한 납골당을 1,000만원 이상을 내고
이장을 한다는것은 도저히 마음이 안 내킨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후손들이나 편하게
화장을 하는쪽이 나을것도 같지만 아직은 마음을 정하지는 못하겠다.
잔디를 심으면서 봉분도 보수를 해놓아서 기분이 좋다.
그때는 나중에 내가 죽으면 합장할거라고 그런식으로 묘지를 만들었는데 사무실 말로는
30년이 지나서 이제 나는 죽어도 그곳에 못 묻힌다고 한다.
그러니까 납골당하면서 권하는데 그건 아이들도 나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명절때 산소에 가면 비석에 노란딱지가 붙은 묘지들이 많이 보인다.
그건 관리비를 안 내서 가족이 오면 사무실에 꼭 들려달라는 쪽지다.
자식들의 대를 지나 손자들의 대가 되었을때 조부모님 산소 관리비를 낼려고 안하는
사람들도 있을거고, 대가 끊어진 사람들도 있을거고, 후손들이 다 외국으로 이민 가 버린
케이스도 있을테지.
우리 산소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을텐데 지금부터 고민도 하고 연구도 해봐야겠다.
무심한것이 세월이다.
그리고 화살보다도 더 빠른것도 세월이다.
내 아이들이 다 쉰을 넘었으니 나도 이제는 빠르게 정리들을 해야 한다.
편지를 없애고 일기장을 없앴다. 사진은 아이들 하고 같이 정리해야 하니까 그건 미뤄뒀다.
그래도 살아있는 날을 위하여, 남은 세월을 위하여, 블로그는 해야지 하면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