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는 1786년 정조10년에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서 1856년 철종7년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돌아 가셨다.
71세로 서거하시면서 정조, 순조, 헌종, 철종 임금님만
해도 네분을 모셨으니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하신 분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 호는 추사, 원당, 노과등 많은 호를
사용하였으며 19세기 전반 실사구시설을 제창하고, 청나라
고증학의 정수를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했던 학자이다.
또한 독창적인 추사체를 창안 서예가이며 금석학을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추사 박물관은 2층이 추사의 생애, 1층은 추사의 학예, 지하1층은
후지츠카 기증실로 나뉘어져서 관람하기 좋게 되어 있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추사의 생애실로 들어 섰다.
여덞살의 추사가 친아버지 김노경에게 보낸 편지다.
이때 추사는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었기에 멀리 떨어져 있는
아버지에게 그리움이 가득한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내용은, 삼가 살피지 못했습니다. 한 여름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소자는 백부를 모시고 책 읽기에
한결같이 편안하오니 다행입니다.
백부께서는 이제 곧 행차하시려는데 장마가 아직도 그치지 않고
더위도 이와같으니 염려되고 또 염려됩니다.
아우 명희와 어린 여동생은 잘 있는지요?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만
살펴 주십시요. 아뢰어 올립니다.
1816년 추사는 친구 김경연과 북한산에 올라가 이 비석을 찾아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이다.
제주 추사의 유배지다.
오늘날 추사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알려져 있기에 오히려
추사를 잘 알수가 없다는 말도 듣는다.
나역시 추사하면 세한도가 떠오르고 추사체라는 글씨체가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박물관에 와서 보니 파란만장 했던 그의 생애를 알수 있게 되었다.
8살에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갔으며 24살에 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완원과 옹강방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으며 41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었으나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며
돌아와서 66세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된, 그야말로
힘든 생을 살다 가셨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요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라네
추사의 과지초당에 걸려있던 주련의 이 말을 오늘날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정치인들이 새겨 들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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