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수지에 있는 손골성지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이다.
손골에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교회사의
흐름을 보면 기해박해(1839년)이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손골은 박해시 우리나라에 온 도리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포함하여
프랑스 선교사 다섯분이 말과 풍습을 익히기 위하여 머물던 곳이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와 다른 선교사들도 손골을 찾아 머물렀다.
당시 선교사들은 우리나라를 여러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에
성모님 축일을 딴 이름을 붙였는데 손골은 성모취결례(聖母取潔禮)
지역에 속했고 선교중심지 였다.
선교사들은 손골을 중심으로 그 가까운 곳을 선교하다가 다른곳으로
옮겨가서는 그곳을 중심으로 주변 신자들을 찾아보며 선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농번기 때 신자방문을 잠시 멈추고
손골에서 침묵과 단식을 하며 피정을 하기도 하였다. (손골성지 안내문에서)
이 손골성지는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는데 교통이 편하지
않아 자주 찾지를 못했다.
성지성당은 작지만 아담하고 깨끗하다.
11시 미사에 맞춰오느라 서둘렀드니 시간이 너무 이르게
도착하여서 십자가의 길 기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순교자들의 길이다.
손골에는 이 요한과 그의 아들 이 베드로 그리고
손자 이 프란치스코 3대 순교자가 있다. 이들은 충청도
당진 면천 출신인데 박해가 일어나 천안 성거산으로, 전라도로
옮겨가며 살다가 이 손골에 와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병인박해(1866년) 초기에 도리신부의 권유로 손골을 떠나
용인 남성골로 내려와 살다가 포졸에게 잡혔는데 풀려났다가
1870년 좌포청 포교에게 다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3대가 1871년 3월 19일 좌포청에서 함께 순교하였다.(성지 안내문에서)
십자가의 길이다.
이 손골에는 병인박해때 신자 4분이 체포되어 수원으로 끌려
가던중 신봉동 개울가에서 처형되었다. 당시에는 먼저 참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명령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사람들은 길가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개울가 작은
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돌로 덮어 돌무덤을 만들었다.
이곳의 옛 이름이 서봉이고 서봉부락 무명 순교자 돌무덤이라고
불리며 전해내려 왔는데 이 순교자들이 현재 손골성지에
모셔져 있다. (성지 안내문에서)
손골성지에는 십자가의 길과 순교자들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무명순교자들의 묘와 손골기념관이 있으며 성당 지하에
다블 주교님, 도리신부님, 오메트르신부님, 김대건신부님 과
무명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순교자들의 방이 있다. (성지 안내문에서)
우리 반 모임에서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먼저하고 11시 미사를
보고 돌아왔다. 노인들이라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순교자의
묘에는 가지를 못했다. 옛 신앙인들은 목숨도 기꺼히 내놓았는데
우리는 다리 아프다는 핑계로 묘지참배도 안하고 돌아섰다.
오늘날의 우리는 순교는 커녕 조그만한 박해도 못 참아낼거다.
이러면서도 신자라고 감히 말할수 있을런지,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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