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성탄절이다.
성탄절이지만 올 해는 성사도 못 보고 내일 성당도 못 가게 생겼다.
누가 차 태워서 데려다주지 않으면 못 가는 처지가 많이 아쉽다.
아들은 오늘 강원도로 눈꽃 보러 떠났고 요양사는 내일 휴일이라 쉰다.
집에서 평화방송을 보며 미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재활병원에서 치료사가 새로운 운동법을 가르친 후부터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
한 며칠 고생할 것 같다. 늘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면 몸살을 앓기는 했지만
이 번은 좀 심한 것 같다. 그래서 전기장판 뜨겁게 해 놓고 지지는 중이다.
이 사진은 구글에서 가져왔다.
내 유년시절의 성탄절, 경북 영덕의 조그마한 구세군 교회, 우리 가족은
그 교회의 신자였다. 집 바로 옆이 교회이기도 했지만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구세군 교회에서 쌀과 미역을 가져다준 고마움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신
부모님 따라 나도 언니도 전쟁 전까지 이 구세군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주일학교의 우리들은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연극도 노래도
무용도 배우고 연습하여 성탄절에 발표회를 했었다. 별 구경거리가 없던 그 시절이라
교인들은 물론 근처의 교인 아닌 분들도 구경을 하러 오셨다.
언니는 언제나 독창과 무용, 노래도 무용도 못하는 나는 성경 암송으로 행사에
참여하고 선물로 양말, 공책, 사탕, 떡 이런 걸 받았다.
가난하던 시절이지만 성탄절에 교회에서는 잔치를 열었다.
떡을 하고 국수를 삶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까지 사탕도 나누어 주곤 했었다.
성탄절날 새벽에는 성가대원들이 집집마다 돌며 대문 앞에서 성가를 부르면
그 집에서는 떡국이나 팥죽으로 대접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지금 성탄절이라고 대문 앞에 가서 합창으로 노래 부르면 신고감이겠지만
그때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우리 가족은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영덕우체국
근무로 그 당시에 영덕에 살았던 것인데 전쟁이 나니까 영덕에서 경주까지
걸어서 피난을 고향으로 왔다. 그리고 다시는 영덕으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우리 가족은
자연스레 구세군교회와도 멀어졌다.
이제는 카드도 카톡으로 보내는 세월, 덤덤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맞는다.
이웃님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