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옥은 일제강점기 구마모토 리헤이가 봄과 가을 등 두 세차례 농장을
방문할 때 임시거처로 이용하여 별장과 같은 구실을 하던 건물이다.
건축당시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한 건축비를 들여 만든 초호화 건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미터법을 사용하여 건축된 집이다.
외부형태에 있어서는 유럽의 형식을 따랐으며 벽난로를 설치한 응접실과
다다미를 깐 거실과 복도등을 일본식으로,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침실에는
한식온돌을 설치한 당시로서는 초호화 주택으로 일제시대 농장주들의
토지수탈의 실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해방 후 우리나라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 쌍천 이영춘박사가 이용했다는 의료사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현재 내부는 이영춘박사 기념전시관으로 조성되었다.
평생을 가난한 농촌 의료봉사에 몸바친 쌍천 이영춘 박사의 이 가옥은
그가 설립한 군산간호전문학교 건물과 마주하고 있다.
지붕과 외벽은 백두산 낙엽송으로 만들었다고 함
건물의 외부 모습은 전체적으로 각각의 공간이 밖으로 돌출되어 요철을
지니도록 설계하여 실제 평수에 비하여 커보이는 효과를 주고 있다.
먼저 건물을 앞뒤로 둘러보니 정말 아름답고 장관으로 보인다.
이런 집을 지어놓고 봄, 가을 몇차례만 이용하였다는 구마모토 리헤이라는
농장주의 부를 실감케 한다.
지붕을 덮은건 청판석이라는 돌판이라고 한다.
유리창도 이렇게 넓게 만들어져 있다.
냇가에서 주워 온 둥근자갈을 이용하여 쌓은 벽난로 굴뚝이다.
불조심이라는 뜻의 일본어가 보인다.
건물안 이영춘박사의 기념관으로 들어 가 보았다.
쌍천 이영춘 박사는 1903 년 10월 16일 평남 용강군 귀성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평양고보에 진학하여 교사생활을 하다 갑작스런 병으로 휴직을 한 후
독학으로 1925년 4월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 1929년 졸업후 의료인의 길로
접어 들었다.
1935년 4월 33세의 젊은 나이에 군산의 구마모토 농장 부설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하게 된 이영훈 박사는 일본인 농장에서의 근무를 식민지 약탈에 피폐해
가는 동족들의 아픔을 직접 치료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먼 길도 마다않고
자전거로 무료진료를 다녔다.
이영춘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울만큼 우리나라 최초로 양호교사제를
도입, 한국농촌위생연구소 설립, 결핵, 매독, 기생충을 3대 민족으로 독으로
생각하고 그 퇴치에 앞장섰다.
1973년 부터 옥구군지역에 국내최초의 민간의료조합을 구성하여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1980년 11월 25일 타계할 때 까지 군산지역 발전에 굳건한 토대가 된
분이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하여 정원이 보인다.
영국제 스테인드 그라스로 그려진 창문의 위쪽
이영춘 박사께서 생전에 쓰시던 물건들이다.
이영춘박사의 손때가 묻은 책들
이 거실 바닥은 당시로서는 희귀한 티크 목이다.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서양식 벽난로다.
이 건물은 빙점, 모래시계, 야인시대등 드라마의 찰영지로서 눈에
익은곳이기도 하다.
설명을 들으며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이영춘 박사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면서 또 한편 구마모토 리헤이의 초호화 생활상을 상상 해 보며
마음이 많이 착잡했다.
이번 1박2일의 군산여행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저 스쳐 지나치기만 했던 군산을 구석구석 돌아보며 느낀건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허물어 버린다고 수치의 과거사가 지워지는건 아닐진데 군산시처럼 이렇게
보존하면서 후세들에게 역사의 산교육장을 제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다는건 참 의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군산시와 군산시민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