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불 해수욕장에서 영덕읍내로 들어오는 해안길은 정말 아름답다.
날씨조차 맑아서 흰 파도가 물결치는 바다를 끼고 해맞이공원, 삼사해상공원의
이정표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언니는 아무 관심도 없이 읍내로 빨리 가자고만 한다.
빨리 가서 "등내" 라는 동네의 "술이" 를 찾아 보자고 한다.
언니의 60년전의 기억속의 사람들과 기억속의 동네를 찾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우리가 다녔던 영덕초등학교를 기점으로 해야겠기에 위선 찾기 쉬운 학교부터
찾아 갔다.

영덕 초등학교, 언니는 이 학교를 졸업했고 나는 3학년 때 6,25 를
만났다. 어릴적의 학교를 찾아 가보면 운동장이 언제나 작아 보이곤 하는데
이 영덕학교의 운동장은 60년만에 찾아갔어도 아직도 넓고 커 보인다.
그때는 얼마나 컸을까?

언니는 여기서 자동차에서 내린다. 그러면서 웬일로 사진까지 한장
찍어달라고 한다. 아무것에도 관심없던 언니가 이곳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일상으로 돌아오는것이 반갑고 신기하다.


학교옆으로 우체국이 보인다. 아버지가 근무했던 곳이다.
저 우체국을 지나 내를 건너고 멀리 사진으로 보이는 산밑 어디쯤이
"등내" 라는 마을이었는데....
자동차를 그쪽으로 몰았다.
옛 마을이 그대로 있을리가 없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서 길가는 사람들
에게 위선 "등내" 가 어디냐고 물었드니 모두 모른다는 대답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와 산을 보면 여기쯤이 맞는데 모두 모른다고 하니
자동차는 두고 걸어서 찾아 나서 보기로 했다.
마침 지나가는 나이드신 할머니 한분에게 다시 물었다."등내" 가 어디냐고?
그런데 할머니는 알고 계신다. "여기가 등내에요" 다.
그러면서 동네 이름이 덕곡동으로 바뀐지가 오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알리가 없지....
다시 그 할머니에게 물었다. 혹시 이 동네에 오씨네 집이 있느냐고.
바로 이집이 오씨네 집입니다 하고 가르쳐 주는 한 집을 찾아 들어갔드니
92세의 할머니가 세탁기도 없이 빨래를 손으로 하고 계셨다.

(영덕을 흘러가는 오십천의 사진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린시절 멱감기를
했었다)
할머니는 기억력이 아주 좋고 귀도 밝아서 우리가 찾아 온 사연을 얘기
하니 언니가 찾는 그 "술이" 라는 사람은 포항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다고
하면서 희안하게도 어린시절의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다.
먼 친척뻘 되는 분이다.
우리 아버지도 우리 어머니도 다 기억하시고 내가 서울에 살고 있는것 까지
다 알고 계신다. 얼마나 반가운지 언니는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인다.
' 그러면서 호주머니에서 돈까지 꺼내서 할머니 손에 쥐어 준다.

기억력도 좋고 귀도 어둡지 않지만 불행하게도 글을 몰라서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한다. 걸려 오는 전화만 받고 자기가 전화를 걸줄은 모르니까
"술이"의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한다.
' 언니가 만나고 싶어하는 친척분들은 다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할머니에게서
들었다.
집 찾느라 카메라도 핸드백도 다 자동차에 두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같이 사진 한장 못 찍는걸 언니는 내내 아쉬워 한다.

영덕에서는 더 찾을 수 있는 사람도 없기에 자동차를 경주로 향했다.
여기는 강구항.
어릴적 우리가 소풍으로 많이 왔던 곳이다.

잠깐 강구항에 자동차를 세웠드니 언니는 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렇게 가보고 싶어하던 강구항인데도 역시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대게철이 지나서 강구항은 한산하다. 혼자서 입구길을 조금 걸어보니
재미도 없고 덥기만 하다.


호객하는 사람들이 불렀지만 그냥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강구항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꽁치통조림 공장이 있어서 어릴적
그 통조림 공장 구경도 가곤 했는데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 강구항에서 부터 고래불 해수욕장까지 50킬로 미터의 길이 '불루로드" 다.
우리는 걷는길을 버리고 그 옆 자동차길로 위에서 부터 거꾸로 내려
왔지만 거꾸로 내려오나 바로 올라가나 동해의 경치야 다를리도 없고
바다가 너무 아름다웠지만 아무곳에도 들리지를 않았다.

언니는 경주로 빨리 가자고 조르기만 한다.
포항을 거치면서 호미곶도 들려보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도 가보고 싶었지만 그냥 열심히 자동차만 몰았다.

경주의 외가마을인 동천리 이다.
어머니는 칠남매였다. 배우자까지 합쳐서 열네명중 오직 한분의 외숙모만이
살아 계신다.
그 외숙모님을 뵙고 가자고 해서 경주로 온 것이다.

외사촌 오빠는 논 일을 나가고 86세의 외숙모는 마침 장날이라 장에
가셨다고 한다.

동네 전체가 팬션으로 고쳐져 있는데 외가집만은 그대로 있는걸
보니 돈이 넉넉하지 않은가 보다.
언니는 그게 또 마음이 아픈가 보다. 내내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모내기가 끝난 논 위로 보이는 숲이 현덕왕릉이다. 어릴적 저 능에서
화전놀이를 하던 동네사람들이 이제는 아무도 안 보인다. 이사도 갔고
돌아가시기도 했고...
외숙모는 어두워서야 장에서 돌아 오셨다.
내가 봉투를 준비해 가서 드리는데도 언니는 호주머니에서 또 얼마인가를
꺼내서 외숙모에게 건네면서 운다.
"외숙모님, 마음씨 좋은 외숙모님!! 어릴때 배고파서 찾아오면 얼굴 한번
안 찌푸리고 상차려서 주시던 외숙모님" 하면서 운다.
이번 언니와 함께 한 3박 4일의 여행 내내 언니는 밤마다 가방을 뒤지고
경치나 이런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지만 사람에는 유난히 집착같은 그리움을
갖고 있었다. 영덕에서 애타게 찾던 "술이" 라는 분은 못 만났지만 먼친척
할머니 한분 만난걸 아주 행운으로 알고 좋아라 했었다.
물론 경주의 외숙모님이 살아계시는것도 너무나 좋아했고.
어제도 전화가 왔었다.
가을에 그분들 만나러 다시 한번 가보자고.
이번에는 선물도 좀 사가서 그 집에서도 하룻밤 자고 오자고 조른다.
그래 그게 언니의 소원이면 또 와야지.... |